미래와 과거를 바라본 야누스 뉴턴
일요일, 14 12월 2008, 12:14 오후 에 Shin Seoggyun
 

미래와 과거를 바라본 야누스 뉴턴

뉴턴

가장 위대한 과학자

“그는 사상의 낯선 바다를 홀로 항해했다.”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인에게 뉴턴은 그윽한 표정을 지닌 사람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뉴턴의 차분한 얼굴에 자리 잡은 두 눈은, 실제로는 앞으로 튀어나온 데다 흐리멍덩하기까지 해서 그다지 이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 매양 그러하듯이 애매한 표현을 하곤 했다. 뉴턴은 종종 신경질을 부렸고 거의 언제나 우울했다. 그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뉴턴은 ‘딱 한 번’ 웃은 적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대체 유클리드 기하학이 살아가는 데 무슨 쓸모가 있는 겁니까?” 하고 묻자 웃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뉴턴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언제나 매우 짧게 대답했다. 심지어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는 경우에도 그러했다. 이는 자신의 엄격한 이상을 충실히 따르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가 추구한 이상은 수학적 정확성이었다. 뉴턴은 이러한 형식적 엄격성을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안에 녹여냈다. 과학자로서 생애의 절정기에 그는 역학(力學) 전체를 세 개의 간결한 운동법칙으로 요약했다. 그리고 말년에 접어들어 그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지극히 간략한 본질적 명제들로 압축시켰다.

그는 언제나 말수가 적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증명 단계를 늘리는 것처럼 세련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어떻게 그 많은 발견을 해냈느냐고 뉴턴에게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답했다.

“언제나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논박의 여지가 없는 답변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점차 빛이 떠오를 때까지” 며칠이고 한 문제에 놀랍도록 정신력을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떠오른 ‘빛’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이 됐다. 뉴턴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만약 뉴턴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과학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평범한 소년 시절

뉴턴 집안은 자영농으로서 한때 울즈소프(Woolsthorpe)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다. 어린 뉴턴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죽었고, 어머니는 이웃 교구의 목사에게 개가하여 뉴턴은 여러 해 동안 할머니 곁에서 자랐다. 울즈소프 근방에서 뉴턴은 ‘항상 착실하고 조용하며 생각이 많은 소년’, ‘이웃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소년’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해시계와 물시계 같은 독창적인 도구를 만들어서 어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또 물감을 혼합하는 방법과 마술 수법을 정리하여 일일이 공책에 기록해두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뉴턴은 자신과의 대화를 즐길 줄 알았고, 칼로 나무를 깎아 이런 저런 모양을 만드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기계 공작에 취미를 가진, 외롭지만 혼자서도 잘 지낼 줄 아는’ 소년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보다 학업 면에서 우월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링컨셔에서 평범한 농부가 되어, 예정된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삼촌의 주선으로 18세 되던 해에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은 그 후 35년 동안 뉴턴의 고향이 되었다. 학부 시절 뉴턴은 수학․천문학․광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주어진 것만을 수동적으로 배웠으며,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이상의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학사 학위를 받은 1665년 1월, 그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평범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또 한 명의 예비교사일 뿐이었다.

최고의 이론과학자, 최고의 실험과학자

그러나 이 기간의 평범함을 뉴턴의 재능이 매우 서서히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의 천재성은 이 무렵까지 성숙되지 않고 있다가 얼마 후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활짝 피어났다. 학부 2년을 마쳤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17세기 과학 지식 대부분이 입력되어 있었다. 그 지식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그 상태로 한동안 파묻혀 있었다. 1666년 말에 그는 미적분학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수학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였다. 또 빛과 색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진리도 발견했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실험 연구 중 하나였다. 그는 울즈소프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관찰하다가 달이 마치 사과처럼 지구를 향해 지속적으로 ‘낙하’하는 물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낙하 현상을 일으키는 힘을 설명할 수학적 방법을 고안해냈다. 물리학사상 최고의 발견인 만유인력의 법칙에 바야흐로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주제들에 착상했다는 점에서 뉴턴의 재능은 실로 비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놀라운 점은, 수많은 뛰어난 재능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의 재능은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한 사람에게 그토록 여러 가지 재능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과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급 실험과학자 중에서 저명한 이론가가 배출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최고 수준의 이론과학자들─아인슈타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가운데 탁월한 (또는 그만저만한) 실험과학자가 배출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뉴턴은 ‘탁월한 실험과학자’인 동시에 ‘최고급 이론과학자’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위대한 과학자들 중에서 오직 뉴턴만이 순수 수학 영역에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뉴턴은 세 가지 다른 분야─극소수의 과학자들만이 그 중 한 분야에서 겨우 업적을 이룰 수 있다─에서 모두 최고 수준의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뉴턴은 불과 24세의 나이로, 자신이 묵묵히 흥미를 느껴오던 폭넓은 주제들에 그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광학

빛과 색채

뉴턴의 광학 연구─그가 가장 좋아한 연구 분야로 맨 처음 출간한 책도 이 방면에 관한 것이었다─는 기존의 색채 현상 이론에 결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뉴턴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자신의 방 덧문을 닫아걸고, 덧문에 지름 6밀리미터 가량의 작고 둥근 구멍을 냈다. 이 구멍을 통해 가느다란 햇빛이 그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구멍 가까이에 프리즘을 갖다 대어 반대편 벽에 스펙트럼이 투사되도록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을 수학자의 눈으로 관찰했다. 벽에 비친 스펙트럼은 둥근 모양이 아니라 기다란 직사각형이었던 것이다. (덧문에 난 구멍은 원형이었다.) 그는 이 신기한 현상에 주목했다.

당시에는 빛이 주어진 각도에서 프리즘을 통과할 때 얼마만큼 굴절되는지를 결정짓는, 데카르트가 발견한 수학법칙─뉴턴도 익히 알고 있었다─이 있었다. 이 법칙에 의하면, 뉴턴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에 지름 5센티미터의 동그란 스펙트럼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뉴턴이 실험에서 관찰한 직사각형 스펙트럼은 가로가 5센티미터, 세로가 33센티미터나 되었다. 세로 길이가 예상치보다 다섯 배 이상 길었던 것이다. 빛의 윗부분은 굴절법칙보다 더 많이 굴절되었고, 아랫부분은 덜 굴절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스펙트럼의 세로 길이가 길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정교한 굴절법칙에 무언가 큰 결함이 있다는 증거였다.

뉴턴은 잠시 색채에 관한 문제를 제쳐두고, 굴절의 불규칙성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는 프리즘을 한 개 더 가져다가 첫 번째 프리즘과 벽 사이에 놓고, 굴절된 광선의 여러 부위에 대보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뉴턴은 처음에 더 많이 굴절되었던 광선 부위가 두 번째 굴절에서도 정확히 같은 비율로 더 많이 굴절되는 것을 발견했다. 덜 굴절된 부위 역시 정확히 같은 비율로 덜 굴절되었다. 광선의 어느 부위를 프리즘으로 굴절시키든 매번 동일한 굴절률을 보였다. 다시 말해서 광선 전체가 획일적인 규칙성을 보인 것이 아니라, 광선의 부위에 따라 각기 상이한 규칙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뉴턴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프리즘에 비친 영상이 길게 나타난 원인은 빛이 각기 다른 굴절률을 가진 광선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빛은 굴절 각도에 따라서 벽의 여러 부분으로 투사된다.”

뉴턴은 ‘다른 굴절률’을 지닌 광선들이 각기 다른 색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한 개 더 준비한 프리즘을 굴절된 광선의 푸른색 부분에 갖다 대자, 그 부분은 동일한 각도로 굴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푸른색이 그대로 남았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굴절시켜도 색은 바뀌지 않았고, 굴절 각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동일한 굴절 각도를 지닌 광선은 동일한 색을 지니며, 동일한 색은 동일한 굴절률을 갖는다.”

프리즘은 빛을 ‘분리’할 뿐

뉴턴이 발견한 바와 같이 기존의 색채 이론에는 오류가 있었다. 그 이론에 의하면 프리즘은 균질적인 빛에 ‘변화’를 초래하여 다양한 색채들을 생성하고, 이 변화된 빛을 한 번 더 굴절시키면 또 다른 색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몇 번을 굴절시키든 파란색은 파란색 그대로, 붉은색은 붉은색 그대로 남는다. 일곱 가지 ‘기본 색상’은 아무리 여러 번 굴절시켜도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프리즘은 순수한 백색 빛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백색 빛의 상이한 부분들을 그것의 독특하고 고정된 굴절 각도에 따라 ‘분리’할 뿐이다. 그러므로 뉴턴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색채는 굴절이나 자연적 물체의 반사에 의한 ‘빛의 변화’가 아니다. 색채는 본원적이고 선천적인 속성으로서, 다양한 광선들 속에 본래부터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떤 광선은 본래 붉은색을 띠고, 어떤 색은 본래 노란색을 띠는 것이다.”

태양에서 방사되는 빛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순수하고 균질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뉴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기 다른 굴절 각도와 다른 성향을 지닌 ‘혼란스러운 광선들의 집합체’는 우리로 하여금 색채에 대한 감각을 느끼도록 만든다. 우리의 지각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색채들은 통상적인 무색의 빛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13쪽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글로 자신의 발견을 발표했다. 그리고 발표한 지 6년 후인 1672년, 그는 이 글을 런던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가식적인 겸양은 전혀 부리지 않고, 그는 학회 회원들에게 자신의 글이 ‘자연계의 운행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찰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닐지 모르나 가장 색다른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뉴턴은 뒤로 물러나 갈채와 환호를 기다렸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뉴턴은 이 일로 인해 분통 터지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된다.

선구자의 좌절

왕립학회의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 이 두 명의 대표적인 광학자들은 자신들만의 색채 이론─기존의 이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새로운 학설에 대해 지극히 인습적인 관점을 견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일정한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기계론적 가설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볼 때 무명의 아이작 뉴턴은 단순히 또 하나의 ‘가설’을 고안해낸 인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뉴턴은 얼마나 ‘가설’이란 말을 싫어했던가!) 뉴턴은 백색 안에 일곱 가지 기본 색상이 선재(先在)해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색채를 설명했고, 그들은 그 가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뉴턴의 가설은 프리즘이 다양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산출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색채마다 각기 다른 굴절률을 갖는다고 ‘추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뉴턴의 가설을 ‘독창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는 했다. 물론 자신들의 가설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여겼지만 말이다.

속이 상한 뉴턴은 비판자들이 자신의 발견을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색채에 관한 가설을 고안하여 거기에다가 사실을 두들겨 맞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제 실험을 통해서 빛의 성질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이 참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헛되고 무익한 공론을 배격하며, 그것은 가설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백색의 빛이 다른 굴절률을 가진 수많은 광선들의 묶음이라고 ‘가정’하지 않았다. 실험에 의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뉴턴이 훅에게 신랄한 냉소를 던지며 지적했듯이, 이러한 발견은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비판자들은 도무지 납득하려 들지 않았다.

철학적 사변을 폐기하다

뉴턴에게 그것은 쓰라린 경험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만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뉴턴은 세계에 새롭고 위대한 발견을 가져다주었으나, 과학계의 거물들은 그의 발견이 그들의 낡은 통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뉴턴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의 압도적인 지적 우월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뉴턴에게는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 학생을 가르치듯 과학계의 거물들에게 철학의 참다운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첫째, 사물의 성질을 직접 탐구하고 실험에 의해 그것을 확증하라. 그런 다음 천천히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로 나아가라. 왜냐하면 가설이란 사물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에 대해 결정권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험에 의해 발견된 성질이 가설에 어긋난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탐구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것이 뉴턴이 과학계 선배들에게 던진 조언이었다.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자연철학은 이론의 속박을 벗어던져야만 한다. 실험에 의해 확증된 사물의 성질이 기존의 이성적․철학적 원리로 이해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성질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철학적 원리에 의해 선험적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뉴턴은 아직 젊고 이름 없는 일개 수학 교수일 뿐이었다. 그의 과학 개념이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분노에 찬 편지 몇 통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뉴턴이 다른 사람들과 공적인 충돌을 벌인 첫 사건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오만하고 변덕스러운 아이처럼 마음속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툭하면 노발대발 화를 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걸핏하면 볼멘소리로 자연철학이 ‘논쟁적’이고 ‘끝없는 공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리곤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과학에 관한 질문을 하면 그는 거만하게 “나는 철학적 사변을 폐기해버렸다”고 답했으며, 실제로 종종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삼위일체 교리(그는 내심 그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법적 권위(그는 그것을 깎아내리려 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예언(그는 그 내용을 해독하고 싶어했다) 등을 탐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만유인력의 발견

뉴턴이 학계에 제왕처럼 군림하기 전까지, 독재와 신경질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원리였다. 그는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우로 선출되었고, 2년 후에는 루카스 석좌(碩座) 수학 교수로 임명되어 케임브리지에서 수도사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강연을 했지만 청중도 별로 없었고 강연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친구도 별로 많지 않았다. 그는 주변 친구들을 젠틀맨답지 않은 시골뜨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된 어머니에 대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해마다 잊지 않고 울즈소프로 어머니를 찾아갔다.

오류를 그토록 싫어한, 심지어 틀린 것으로 비치는 것마저도 싫어한 뉴턴에게 만유인력 이론은 성가신 골칫거리를 안겨주었고, 그는 이 때문에 꽤 오랫동안 곤혹스러워했다. 한 점의 의문도 없이 진실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그 이론은 이성주의적 사상가들에 의해 거짓이고 위험스럽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이론으로 배척당하기 십상이었다. 만유인력 이론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뉴턴이 이 골칫거리를 해결한 방식은 과연 그다운 것이었다. 울즈소프에서 어느 가을날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린 때부터 18년이 지난 후 그에 관한 책을 써 내려갈 때까지, 만유인력 개념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뉴턴의 뇌리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그는 과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펴냈다. 그것은 바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흔히 줄여서 《프린키피아 Principia》라고 한다─였다.

만유인력 이론에서 가장 믿기 힘든 부분은 물질의 중심부가 전적으로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수백만 킬로미터 밖에 있는 어떤 다른 물체를 전혀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끌어당긴다’고 주장하는 점이었다. 이 불가해한 ‘원거리 작용’은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작동하며, 게다가 불가사의하게도 그 힘은 소멸되지 않았다. 힘이 결코 약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힘은 모든 물질을 통과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방해하거나 감소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힘이었다. 이렇듯 역설적인 원리는 말로만 설명해서는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만유인력 이론의 단초가 되는 ‘근본적인 발견’은 뉴턴과 호이겐스 두 과학자가 제각기 독립적으로 해냈다. 호이겐스는 이 발견─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뉴턴은 이 발견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이룩했다. 이 ‘근본적인 발견’은 원심력법칙으로 알려졌다.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1644년 데카르트가 주장한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였다. 즉 한 물체는 다른 물체의 방해가 없으면 같은 속도로 영원히 직선운동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물체가 원운동을 할 경우 그것은 원의 접선을 따라 직선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부단히 ‘시도’할 것이다. 줄에 매달려 회전하는 물체는 줄에 의해 당겨지지만, 호이겐스에 의하면 그 ‘시도’는 팽팽한 줄의 ‘장력’으로 느낄 수 있다. 뉴턴과 호이겐스 두 사람은 모두 회전 중심부에서 벗어나려는 이 ‘시도’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을 찾아냈다.

두 사람보다 후대에 살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그것이 천체─천체에서도 행성들은 궤도를 돈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분명 행성들은 회전 중심부로부터 벗어나 밖으로 날아가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심력과 대등한 어떤 힘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행성들은 분명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호이겐스는 위대한 과학자였지만 반대 방향으로 가해지는 이 힘이 ‘인력’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현상이 가능한가? 행성들은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줄이나 비물질적인 견인력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다. 호이겐스는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에테르의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지구를 궤도로 ‘밀어 넣는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지구를 에워싼 소용돌이는 사과를 지구 중심을 향해 밀어낸다고 했다. 제아무리 많은 사과가 호이겐스의 발밑에 떨어질지라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주의적 철학자로서 그는 평생 ‘참되고 건전한 철학’의 포로였다. 그러나 뉴턴은 달랐다. 그는 일개 이성주의적 철학자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종교적 확신이 과학적 발견에 미친 영향

천재의 직관 배후에는 경신(輕信)과 의심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참되고 건전한 철학’보다 한층 강력한 확신이 뉴턴의 생각을 지배했고, 그럼으로써 뉴턴의 사고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확신은 종교적 확신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의심과는 별개로, 뉴턴은 링컨셔의 여느 열정적인 청교도만큼이나 열렬하게 《구약성서》의 절대적 신─신비스런 방법으로 자의적 권능을 행사하는 히브리 신─을 굳게 믿었다. 뉴턴은 신의 섭리가 세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매 순간 신이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지배하고 존속시킨다고 믿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의 증거를 찾아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뉴턴에게 스스로 돌아가는 세상을 창조만 하고 방치해두는 최고 존재(Supreme Being)는 데카르트 같은 위장한 이교도들의 신일 뿐이었다. 뉴턴은 마치 순박한 사제처럼 데카르트에게 맹렬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신이 자신의 피조물의 세계를 참으로 통치하고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뉴턴의 생애를 건 목표였다. 이런 목적의식과 확신으로 뉴턴은 기존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물질의 힘이 모든 자연 현상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의심할 수 있었다. 그는 궁극적 원리가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힘’이라고 간절히 믿었다. 뉴턴의 이른바 ‘운동법칙’은 신의 정당한 의지에 의해 직접적으로 선포된 것이었다. 만일 그와 같은 비물질적 힘의 존재가 입증된다면, 창조주의 직접적인 활동 없이는 세계가 단 한순간도 존속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따라서 기계론 철학으로 위장한 이교도들의 주장에 맞서 신의 섭리가 옹호될 수 있었다.

지구 중심을 향한 비물질적 견인력에 의해 물체가 지구 중심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뉴턴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과가 떨어질 때 발생하는 힘과 동일한 힘이 지구 저 멀리까지 뻗어 달마저도 지구로 ‘낙하’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를 펼칠 수 있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새로운 철학자들’은 그런 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검증 가능한 것이었다. 분명 지구 중심을 향한 이 ‘낙하’는, 지구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달의 원심적 경향과 대등한 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달이 궤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원심력을 측정할 수 있게 된 뉴턴은 또한 구심력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달이 1초에 얼마만큼이나 지구를 향해 끌리는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지구의 중력이 낙하하는 사과를 1초에 얼마나 끌어당기는지를 알아냈는데, 그 답은 5미터였다.

달을 끄는 힘과 사과를 끄는 힘은 같은 힘인가? 1초 동안 낙하하는 두 물체를 비교함으로써 뉴턴은 흥미로운 결과에 도달했다. 그 힘은 물체가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약해졌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힘이 수학적 규칙에 따라 약해졌다는 것이다.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했다. 예컨대 거리가 세 배 늘어나면 인력은 9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 수학적 규칙은 근사치에 해당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뉴턴의 처음 계산법이 다소 조잡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뉴턴이 1666년─그의 지도 교수 이외에는 아무도 뉴턴의 이름을 몰랐던 시절─에 울즈소프에서 착상한 것이다. 그 후 13년 동안이나 뉴턴은 만유인력 이론을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광학과 미적분학 연구, 그리고 종교적 비의에 대한 근면한 탐구 같은 즉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에 매진했던 것이다.

《프린키피아》 출간

뉴턴 생애의 위대한 다음 단계는 1679년에 열렸다. 그 해에 뉴턴은 실망스럽게도 자기 말고도 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뉴턴이 가장 싫어했던 로버트 훅이었다. 자신이 고안해낸 미적분학이라는 막강한 수학적 도구를 이용하여 (아직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도구였다) 뉴턴은 인력의 법칙을 실제에 근접시키는 거보(巨步)를 내디뎠다. 그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그 힘이 움직이는 물체를 정확히 타원형 궤도로 움직이도록 ‘구부린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이것은 뉴턴 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확증이었다. 케플러의 법칙에 의하면 행성의 실제 궤도는 타원형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증명은 어느 누구도─훅마저도─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뉴턴은 여기서 만족하고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접었다. 그는 개인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승리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것이어서 뉴턴은 그 증명을 기록한 자료들을 다른 곳에 치워두었다가 그만 분실하고 말았다.

훅에 대해 개인적 승리를 거두고 4년 후, 어느 수완 좋은 낯선 방문객이 만유인력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발표하라고 뉴턴을 부추겼다. 이 방문객은 에드먼드 핼리(Edmund Halley, 1656~1742)라는 젊고 똑똑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마치 스승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뉴턴에게 접근했다. 핼리는 모든 것을 설명해달라고 간청했고, 뉴턴은 즉각 작업에 착수했다. 20개월 동안 놀랍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완성했다. 이 원고는 핼리가 비용을 부담하여 1687년 여름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값은 7실링이었다.

《프린키피아》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그것은 근엄한 기하학 서적처럼 온갖 기하학적 증거들─복잡한 도표들이 첨부된─에 의해 엄밀하게 증명된 명제와 정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한층 더 막강한 힘을 지닌 기하학처럼 보였다. 그 주제가 정적인 ‘선’이나 ‘면적’이 아닌, 변화하는 ‘힘’이었으며 운동에 가속도가 붙는 ‘물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하학을 ‘동영상’이라고 한다면, 유클리드의 낡은 기하학은 ‘사진’과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프린키피아》는 고대 그리스 수학처럼 웅장한 연역적 방식으로 개진되었다는 점에서 기하학 책과 흡사했다. 즉 뉴턴은 간단한 일련의 정의(定義)와 공리(公理)―세 가지 운동법칙─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복잡하고도 광범한 명제들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마침내 심적 부담을 덜어낸 뉴턴은 아예 마음을 비우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뉴턴의 거침없는 증명 과정은, 이 책 3권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두 물체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의 곱에 정비례하는 인력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명제를 증명하는 장면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뉴턴에 의하면 중력이란 광대한 우주의 행성들 사이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두 입자 사이에서 작용한다. 어떻게 두 개의 먼지 입자가 뉴턴의 법칙에 따라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가설적인 논의 메커니즘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들다.

《프린키피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단 만유인력의 법칙이 확립되자 뉴턴은 수천 년 동안 과학자들을 좌절시켜온 신비를 풀기 위해 ‘자연 현상’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법칙’을 활용해 어째서 하루에 두 번씩 밀물이 있으며, 사리와 조금이 발생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했다. 심지어 대양에서 조수가 차오르는 높이까지 계산했다. 마침내 그는 혜성의 신비로운 궤도를 설명하고, 둥근 공 모양의 지구가 극지에서는 얼마만큼 평평해지는지를 논증했다. 태양과 행성들의 크기를 측정하고, 지구의 자전축이 2만 5천 년마다 한 번씩 회전하는 이유─케플러마저도 해결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던 문제─를 밝혀냈다. 또한 오랫동안 천문학자들이 의문을 품어온, 달의 일반적인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나타난 다양한 섭동(攝動)을 수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수많은 자연 현상들을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누구보다도 정교한 용어로 설명했다. 그는 자연 현상에서 도출한 몇 개의 운동법칙에서 출발했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설파한 가장 대담한 이론만큼이나 포괄적으로, 그리고 열차 시간표만큼이나 정밀하게 우주를 단일한 법칙 체계로 짜 맞추었다.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업적이었다.

우리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모든 이성과 모든 철학, 그리고 모든 건전한 상식에 반하는, 원거리에서 작용하는 이 감지할 수 없는 인력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의문이 《프린키피아》 곳곳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뉴턴 자신도 그 의문을 떨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독자들에게 몇 번이나 자신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뉴턴은 물체가 말 그대로 먼 거리에서 다른 물체를 ‘끌어당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인력은 물리적인 견인력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힘을 물리적 힘이 아닌 수학적 힘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내가 그런 언급, 즉 견인력의 중심점에 대한 언급을 했다고 해서 나 자신이 그런 운동의 종류와 방식, 원인과 물리적 이유 등을 규명하는 일을 떠맡거나 물리학적 의미에서 (수학상의 점에 불과한) 특정 중심점이 그 힘의 근원이라 주장할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의 물리적 원인이나 위치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러한 힘들에 대한 수학적 개념만을 제시하고자 할 뿐이다.”

물리적 원인이 아니라면 대체 ‘힘’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뉴턴의 대답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힘이란 알 수 없는 원인의 ‘효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지의 원인이 ‘전파하는’ 힘의 수학적 크기이다. 중력은 행성이 태양을 향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이 운동을 야기하는 것은 그 무언가의 힘의 ‘크기’이다. 이 힘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힘 그 자체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며 철학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어느 한 원인의 힘은 세 가지 운동법칙에 의해 측정할 수 있다. 제1법칙에 나오듯이, 물체는 같은 속도로 직선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등속운동이 다른 방향으로 변화되었을 경우, 우리는 이 법칙에 의해 그 물체에 어떤 원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의 힘은 그 원인이 초래한 변화의 ‘총계’로 측정된다. 뉴턴은 중력에 관해 설명하면서 자신은 그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런 가설도 만들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중력이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가 설명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천체와 바다의 모든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당당한 선언으로 뉴턴은 자연철학에서 그가 이룩한 혁명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호이겐스 같은 철학자들은 《프린키피아》가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책이 비록 장엄한 것이기는 하지만 저자 뉴턴은 중력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뉴턴의 법칙에 따라 행성들이 태양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철학은 행성들을 추진하는 힘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뉴턴은 측정된 힘의 원인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지만, 철학자들은 이 원인을 미지의 상태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에 답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뉴턴의 대답─그것은 논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은 간단했다. “우리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뉴턴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철학은 그가 설명한 개념을 초월하는 영역으로 들어갈 경우, 낡은 철학에 견주어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허망한 공리공론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철학이 해야 할 모든 일은 여기에, 즉 운동 현상에서 자연의 힘을 탐구하는 데,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힘에 입각하여 다른 현상을 입증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뉴턴은 예언자적 직관으로 자연계에 작용하는 중력과 유사한 다른 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작은 물체 입자들은 원거리에 작용하는 어떤 힘이나 미덕 또는 에너지를 갖고 있어서 그로써 자연 현상의 상당 부분을 산출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러하다면 철학자들은 뉴턴이 수학적 방법으로 중력에 관해 탐구했듯이 힘이나 미덕 또는 에너지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탐구하고 발견해야만 한다.

미래의 과학과 과거의 신앙을 바라본 야누스

뉴턴은 ‘철학이 해야 할 모든 일’이 여기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뉴턴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는 논증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상 유례없는 역저인 《프린키피아》 자체의 압도적 위상을 무기로 승리를 거두었다. 뉴턴이 말했듯이 중력의 법칙은 그의 ‘수학적 방법’의 한 사례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미 뉴턴이 개척한 것보다 과학이 더 멀리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인정했다. 측정된 힘의 ‘원인’은 모른다. 그러나 힘에 관한 뉴턴의 새로운 수학은 기존의 다른 어떤 자연철학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정교하고 엄밀했다. 또한 그것은 한층 자유로웠다. 왜냐하면 뉴턴의 신념은 구속하는 족쇄가 아니라 풀어주는 해방이었고, 그 해방은 바로 근대 과학을 이전의 과학과 구분 짓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제자인 근대 과학자들은 힘의 원인이 무엇인지, 에너지가 무엇인지, 하전입자(荷電粒子)가 어떻게 서로를 끌어당기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힘이나 에너지 같은 개념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고 실험에서 도출 가능하며 뉴턴의 정밀성 기준에 따라 설명이 가능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원인’ 따위는 과학자들로서는 관심 밖이다. 그들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통해 자유를 얻었고 자연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도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논거는 부분적으로만 과학적이었고, 또 부분적으로만 밝혀졌을 뿐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뉴턴이 원한 방법이었다. 진실은 이러했다. 뉴턴 자신은 그의 체계에 힘을 공급하는 신비스러운 미지의 원인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다. 뉴턴은 한 번도 공공연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영적이고 살아 있으며 지적이고 전능한’ 신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본받아 전적으로 신에게 속한 문제를 침범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학적 방법─그것을 통해 과학은 자유를 얻었다─은 우주의 지배자인 신의 지위를 보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마치 야누스와도 같이 뉴턴은 두 방향, 즉 ‘미래의 과학’과 ‘과거의 신앙’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프린키피아》가 출간되었을 때 뉴턴의 나이는 44세였다. 그는 그 후 40년을 더 살면서 명성을 누렸다. 그의 명성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높아져 거의 신처럼 숭앙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명예와 보수가 속속 더해졌다. 그러나 뉴턴의 정신은 그가 살았던 시대, 그를 특별한 영웅으로 바라보았던 그 시대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는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다. 신의 섭리를 옹호한 그의 주장은 결국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열렬한 뉴턴 추종자들은 중력을 ‘물질 고유의 성질’로 파악했고, 뉴턴적인 형태의 새로운 유물론을 부활시켰다. 뉴턴은 나이를 먹으면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뉴턴은 1727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귀족 여섯 명이 그의 관을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옮겼다. 종교에 대한 태도로 말미암아 뉴턴은 그 무렵 흘러간 시대의 역사적 유물이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회의주의적이고 실험적인 세대가 등장하고 있었고, 이 세대는 그가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종교적 정신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이 이 여명기를 ‘뉴턴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기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